진주취향여행/진주역사

논개[포토 툰] 논개 이야기

진주관광 2023. 1. 26. 10:48

여러분 안녕하세요!

금일은 논개 카툰을 안내해드리려고 해요~!

카툰 형식으로 제작되었으니까 논개에 대해 간단하게 한번 보실까요~

성은 주씨(朱氏)이고, 본관은 신안(新安:중국)이다. 전북 장수(長水) 임내면 주촌마을에서 태어났다고

전해지는데 출생일에 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다.

논개에 대한 기록은 조선 광해군 때인 1621년 유몽인(柳夢寅)이 저술한《어우야담(於于野談)》에 전하는데

"진주의 관기이며 왜장을 안고 순국했다"는 간단한 기록만 남아 전한다. 그때문에 논개는 기생이었다고 알려지게 되었다.

구전에 의하면 원래 양반가의 딸이었으나 아버지 주달문이 사망하고 집안에 어려움이 겹쳐 가산을 탕진하자

장수현감이었던 최경회(崔慶會)의 후처가 되었다고 전한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5월 4일에 이미 서울을 빼앗기고 전라도 지역에서

고경명이 의병을 일으켜 왜적과 싸우다 전사하자 최경회가 의병장으로 나서 싸우게 되었다.

경상도에서 진주성만이 남아 왜적과 싸우고 있었는데

최경회는 의병을 이끌고 진주성을 지원하여 승리를 거두었다(제1차 진주성 싸움).

1593년 최경회는 경상우병사로 임명되어 싸웠으나 수많은 군관민이

전사 또는 자결하고 28일만에 진주성이 함락되고 말았다. 이때 최경회는 남강에 투신하여 자결하였다(제2차 진주성 싸움).

1593년 7월 일본군 왜장들은 승리를 자축하기 위해 촉석루(矗石樓)에서 주연을 벌이는데

논개는 최경회의 원수를 갚기위해 기생으로 위장하여 참석하게 된다.

\이 자리에 있던 그녀는 계획대로 열손가락 마디마디에 가락지를 끼고

술에 취한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毛谷村六助]를 꾀어 벽류(碧流) 속에 있는

바위에 올라 껴안고 남강(南江)에 떨어져 적장과 함께 죽었다.

훗날 이 바위를 의암(義岩)이라 불렀으며, 사당(祠堂)을 세워 나라에서 제사를 지냈다.

1846년(헌종 12) 당시의 현감 정주석(鄭胄錫)이 장수군 장수면(長水面)

장수리에 논개가 자라난 고장임을 기념하기 위하여 논개생향비(論介生鄕碑)를 건립하였다.

그가 비문을 짓고 그의 아들이 글씨를 썼다.

1956년 '논개사당(論介祠堂)'을 건립할 때 땅 속에 파묻혀 있던 것을 현 위치에 옮겨놓았다.

비문에는 "矗石義妓論介生長鄕竪名碑"라고 씌어 있다. 장수군에서는 매년 9월 9일에 논개를 추모하기 위해

논개제전(論介祭典)을 열고 있다.


논개 요약

1592년 10월 5일부터 10일까지의 싸움에서 10배에 가까운 왜적을 물리쳐 대승을 거둔

임진왜란 3대첩 중의 하나인 진주성대첩에서 패배한 왜군이 1593년 6월 12여만 대군을 이끌고 다시 쳐들어 온

제2차 진주성 싸움에서 중과부적으로 성을 지키던 민.관.군 7만 명이 끝까지 항쟁하다 장렬한 최후를

마치고 진주성이 함락되자 왜장을 촉석루 절벽 아래의 의암 바위로 유혹하여 그를 껴안고 강물에 투신한 의기입니다

논개가 왜장을 안고 투신할 때 팔이 풀어지지 않도록 열 손가락에 가락지를 끼었다고 전해지고 있어요

이 가락지는 남강을 가로지르는 진주교 교각 상부에 논개 충절의 상징물로서 만들어져 있습니다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적에게 더럽힘을 당하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자결한 여인들은 많았지만,

논개와 같이 한목숨을 던져 먼저 간 성민들의 원수를 갚은 의로운 기개를 가진 장한 여인은 우리 역사에서 그 예를 찾아볼 수 없는데요.

이러한 논개의 정신은 진주 사람들의 마음속에 살아 있으며 진주정신으로 빛나고 있다고 해요.

남강을 가르는 진주교에 가보면 논개를 기리기 위해서 교각에 가락지가 끼워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진주에 놀러 가면 꼭 확인해 보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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